2024.03.11 (월)

  • 흐림동두천 6.0℃
  • 흐림강릉 11.8℃
  • 흐림서울 5.9℃
  • 흐림대전 8.4℃
  • 구름많음대구 10.4℃
  • 구름많음울산 13.2℃
  • 흐림광주 10.5℃
  • 구름많음부산 11.8℃
  • 흐림고창 10.2℃
  • 흐림제주 12.5℃
  • 흐림강화 5.9℃
  • 구름많음보은 7.6℃
  • 흐림금산 7.6℃
  • 흐림강진군 10.8℃
  • 구름많음경주시 13.4℃
  • 구름조금거제 12.1℃
기상청 제공

문화

림삼의 초대詩 "여 보."

융통성이란 원칙을 깨는 것이 아닌 서로의 원칙을 인정하고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 문을 만드는 것이다.

림삼 /칼럼니스트. 시인

- 詩作NOTE -

세상 어떤 남정네가 자기 아내를 생각할 때 가슴 아리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그 중에서도 유독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삶을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황혼녘에 느끼는 회한이 클 것이다. 행복하지 못한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그리고는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흘러 얼굴에 주름 가득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못내 안타깝고 애처로워서, 남자들은 뒤돌아서 가슴을 친다. 그러나 이미 지나쳐버린 젊음과 활력의 시절들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자괴감으로 잠 못 이루면서 남자들은 늙어간다.

이 시는 필자의 속내를 구태여 세세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속죄와 고백의 육필시다. 긴 이야기를 주저리 엮는다고 더 많이 뉘우치는 것은 아닐진대, 결국 하고 싶은 말조차도 다 하지 못할 정도로 목이 메어오는 건 무슨 영문일까? 그냥 혼자 입 속으로 한동안 쉼 없이 읊조려본다. 대답 없는 부름일망정 딴에는 간절한 염원으로 불러본다. 여보- 여보- 내 말 들려?

나름의 사연들이 쌓여 애증과 질곡의 끈을 이은 것이 결국은 살아온 여정의 흔적이라고 하지만, 가능하다면 슬프고 아픈 사연들 보다는 행복하고 흥겨운 이야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주면서 살고 싶었었는데, 능력도 부족하고 주제도 부실한 위인인지라 필자의 삶은 그리 후덕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런 마땅찮은 살림살이의 결과는 모두 가까운 가족들에게 피해와 부담으로 덧입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누가 뭐라 해도 제일 큰 마음의 고초와 육신의 고생을 떠안은 것이 필자의 아내였다.

결국은 아무런 보상이나 보은도 못한 채 덧없이 세월은 흘렀고, 지금에 와서까지도 이미 늙어진 몸과 마음으로 한량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필자의 처지는 더도 덜도 아닌 선천적 천덕꾸러기다. 그럼에도 가슴 저미는 반성이나 판에 박은 후회 보다는, 작은 기쁨일지라도 오늘을 조금 더 충실하게 메꾸는 것이 도리이리라 여기고 애를 쓰고 있으니,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남편들이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리라 여긴다.

필자는 결혼식 주례를 설 때 마다 늘 해주는 권면의 말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축복된 자리에 서서 제언을 할 입장이 못 되어 쉬고 있지만,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서라도 가끔 소재로 삼는 게 부부 사이의 호칭에 관한 풀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신혼부부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닐 것으로 사료되어 인용한다. 우리가 부부 사이에 서로 표현하는 호칭 중에 ‘여보(如寶)’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자로 풀이하면 ‘같을 如(여)’자와 ‘보배 보(寶)’자이며, 이는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하는 말이지, 여자가 남자를 보고 부를 때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남자를 보배 같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다. 그리고 ‘당신(當身)’이라는 말은 ‘마땅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 즉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바로 내 몸과 같다’는 의미이니 곧 ‘당신’이란 의미이며, 이는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하는 말이다. 당신이 나의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여보’나 ‘당신’이 뒤죽박죽이 되었고, 보배와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내 몸 처럼 여기지도 않으면서 ‘여보’와 ‘당신’을 사용하는가 하면, 높이려고 하는 소리인지 낮추려는 소리인지도 모르는 채 남자와 여자가 뒤바꾸어 필요에 따라서 분별도 없이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사실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소리인데 그냥 함부로 사용한다. 그래서 혼인을 하는 신혼부부는 그 소중한 의미를 새기며,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운데 ‘여보’와 ‘당신’이라는 말을 쓰면서 백년을 해로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애용하곤 했던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가족, 사회,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심이 되는 세포 단위가 바로 부부다. 가부장적인 제도가 성행하던 우리 나라의 예전 유교적인 관습 하에서나, 지금도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종교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에서나, 일찍부터 모계 혈통으로 이어져오는 ‘아마조네스’의 전설 속에서나, 현대 사회의 상징적인 트렌드로 불릴 ‘남녀 평등’과 ‘여성 상위’가 정착화된 현실적인 상황에서나, 모든 여건과 특징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는 부부관계의 성립에서 시작되었고, 부부관계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연결되어 온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이며 불멸의 전통이다.

아무리 문화가 발달하고 새로운 과학문명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며 삶의 모습을 완전하게 변화시켜 놓는다 하더라도, 가정의 최우선 적인 주축을 형성하는 부부관계의 존속은 멈추게 할 수도, 바꾸어놓을 수도 없다. 문화나 문명 이전에 천륜의 인연을 창조하는 영원한 기초 작업이며 시작의 의미가 부부 사이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절대적이며 원초적인 부부 사이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그치질 않는 다툼이 있고, 틈만 나면 오해와 의심과 지적이 끼어들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부부 사이의 싸움은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근본적으로 말리거나 종료시킬 수도, 또는 중단시킬 수도 없는 치열하고 끈질긴 분쟁이다. 그저 남들은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멈추기를 기다려야 하는 답답한 노릇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투쟁 중에서 가장 오래 이어져, 긴 역사를 자랑하는 투쟁이 바로 부부싸움이라고 말하겠는가? 허긴 잘 싸우는 부부가 잘 산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세상에 완벽한 아내나 남편이 과연 존재할까? 살다 보면 때로는 바람도 불고, 비도 오고 하는, 궂은 날씨와 다를 바 없는 일에 직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을 것이다.

인생의 굴곡은 원한다고 해서 찾아오고, 바라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은 완벽한 결혼 생활도, 완벽한 가족도 없다. 또한 상처 없는 영혼이 없듯이 상처 없는 가족도 없다. 한 마디로 가족 간에는 ‘최대의 이해와 최소의 상처’의 원칙이 필요한데 행복한 가정 만들기의 필수 원칙 중 한 가지는 ‘건강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지는 누구나 다 행복하게 잘 살아가자는 말이다.

모쪼록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장식해나가려는 다짐으로 재출발하는 오늘부터의 삶이, 나 보다는 배우자를 더 배려하는 겸양과 이해의 마음을 가득 담고 진실된 미래를 향하는 축복의 삶으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밝고 따스한 빛으로 기억되는 우리의 가정을 만드는 주역이 되고,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호칭인 ‘여보’와 ‘당신’으로 거듭나는 부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때늦은 후회로,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할 여건이 되었다거나, 아니면 불러도 대답을 듣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면 그제서야 땅을 치며 안타까워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커다란 깨달음이나 학식을 갈고 닦아야만 행복하고 바람직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항상 양보하고 배려하며 서로 아껴주는 마음이 있으면 세상의 어떤 난관이나 역경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당신의 배우자에게, 평생을 함께 하는 반려자에게, 당신의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보자. 그리고 다정하게 불러보자. 그리고는 정겨운 대답을 들어보자. 여보! 당신!

비단 부부 사이의 관계만 중요한 건 아니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은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관계가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 사이,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식구들과의 일상이야 말로 세상의 역사를 이어주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언제나 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으로 관계가 이어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상담을 요청했던 어느 가장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위암 진단을 받고 힘들게 항암치료를 견디고 계신 저희 어머니의 삶의 희망 중의 하나는 7살 된 손녀, 바로 제 딸입니다.

그 손녀의 생일날 어머니는 힘든 몸을 이끌고 손녀가 좋아하는 피자를 만들기에 처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더구나 옆에서 돕겠다는 며느리의 손도 물리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께서 하겠다고 고집 피우셨습니다. 딸의 생일파티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 약속했는데, 하필 그날 회사에 중요한 업무로 퇴근이 늦어졌습니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저녁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왜 좀 더 기다리지 않았냐고 투덜거리며 어머니가 만든 마지막 피자 한 조각을 재빨리 집어 들었습니다. 순간 딸과 아내가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피자는 제 입으로 들어간 후였습니다. 그런데 그 피자 맛이 이상했습니다. 내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딸과 아내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 때 주방에서 화채를 들고 나온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손녀가 피자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몰라. 아범이 조금만 늦었으면 한 쪽도 못 먹었을 걸.” 아내와 딸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

사랑은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고 어떤 치료보다도 효과적이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을 새겨본다.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어름다운 인연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평소 꼼꼼하게 살림을 관리해도 냉장고 청소를 하다 보면 버리는 반찬이 한두 가지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냉장고 한 구석에 12년 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생채 반찬 통이 있다. 제아무리 냉장고에 보관했다고 해도 12년이라는 세월에, 무생채는 썩을 대로 썩어서 질퍽질퍽하게 뭉개지고 하얀 곰팡이가 빽빽이 피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번에 ‘JTBC’에서 방송된 사연을 들어보니, 사연을 보낸 사람의 어머님은 이 무생채를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12년 전 갑작스럽게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머니.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데, 입원하고 한 달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입원하기 전 딸에게 마지막으로 만들어준 반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사할 때도, 냉장고 청소할 때도, 심지어 냉장고를 새 것으로 바꿀 때도, 자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만들어놓은 무생채 반찬을 어느 것보다 제일 먼저 챙겼다고 한다. 무생채를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나한테 한 가지 남겨놓고 가주신 게 너무도 고맙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연결되어있는 아름다운 사랑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때로는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법률가이자 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남작’은 흑인 노예무역을 격렬하게 비판한 인권 주의자 이기도 했다. 그런 몽테스키외 남작이 우연히 여행하다가 탄 배에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힘겹게 노를 젓는 어린 형제 사공을 보았다.

형제에게 몽테스키외 남작이 물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 그러자 형제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상인이셨는데 해적들에게 잡혀 그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의 주인이 편지를 보내 아버지 몸 값으로 큰 돈을 내야 풀어준다고 하는데 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둘이서 배를 몰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효심에 감동한 몽테스키외 남작은 집으로 가서 형제의 집으로 필요한 큰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면서 누가 이 돈을 보내는 것인지는 절대로 알리지 않도록 했다. 이 사실은 몽테스키외 남작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지인들이 몽테스키외 남작이 남긴 글을 정리하고 출판하기 위해 남작의 일기장을 보다가 알게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소식을 접한 아버지와 두 형제는 몽테스키외 남작의 묘소를 찾아 추모하고 감사했다고 한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선한 마음으로 남을 도울 때는 그것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조용히 남모르게 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혹시 모를 내 안의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좋은 사람의 삶은 사소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친절과 사랑의 행동들로 대부분 채워지기 마련이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었던 사연을 추가로 들여다본다. 병동 2층에서 나지막이 노래가 들려온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러면 중증환자부터 치매 노인까지 모두 자신만의 그리운 누군가, 가고 싶은 그곳을 떠올리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매그너스 재활 요양병원’의 일상이다. 다른 의사들과 회진부터 남다른 올해 93세인 최고령 ‘한원주 원장’의 일과는 이렇게 시작이 된다.

1926년, 여성의 배움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의학대학교를 졸업한 한원주 원장은 산부인과 전문의를 딴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귀국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귀국한 후 개원을 하니 환자들이 수없이 밀려왔다.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는 시기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이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결핵 퇴치 운동과 콜레라 예방 운동, 한센병 환자와 산골 주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에 앞장서셨어요. 그리고 배움이 없던 때 저에게 의학을 공부하게 한 것은 이웃을 위해 살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이후 한원주 원장은 봉사의 삶을 걷게 되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부와 명예를 한 순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졌다. 여든이 훌쩍 넘어 자신의 몸도 돌보기 힘든 나이가 되었지만, 한원주 원장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황혼 앞에 선 노인들을 섬기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한원주 원장이 근무하는 병원은 노인 재활 요양병원인지라 치매나 중풍, 파킨슨병 환자와 같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병원에서는 한원주 원장 본인이 원하는 그 날까지 일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배려를 해 주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환자들과 더불어 하늘나라로 가고 싶은 게 작은 소망이라고 한다. 또한 병원에서 받은 급여는 10군데가 넘는 사회복지단체에 기부를 하고 있으며, 휴가 때에는 해외 의료봉사도 하고 있다. 한원주 원장은 지금도 주 5일을 병원에서 숙식하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그들을 내 가족처럼, 내 몸처럼 돌보며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캐나다 ‘퀘벡 주’에 남북으로 뻗은 계곡이 하나 있다. 이 계곡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서쪽 산등성이에는 소나무, 측백나무, 당광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반해 동쪽 산등성이는 온통 히말라야 삼나무 일색이라는 점이다. 이 기묘한 절경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유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 부부가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어느 겨울, 거의 파경 직전이던 부부가 과거의 애틋한 감정을 되살리고자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이 계곡에 도착할 무렵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부부는 흩날리는 눈보라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동쪽 산등성이에 서쪽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잠시 후 히말라야 삼나무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이 나뭇가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탄력이 좋은 삼나무 가지가 아래로 휘어지더니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을 아래로 와르르 쏟아 냈다.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면 가지가 휘어졌고 이내 눈 더미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현상을 반복하면서 히말라야 삼나무는 눈보라에도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의 가지들은 꼿꼿하기만 할 뿐 눈덩이의 압박에 못 이겨 툭툭 부러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동쪽 산등성이에도 여러 나무들이 함께 우거져 있었을 거예요. 다만 가지를 굽힐 줄 몰랐기 때문에 눈보라에 쓰러져 하나 둘 사라진 거겠죠.” 울컥해진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융통성이란 나의 색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색과 상대방의 색의 조합이다. 적절히 조합하여 더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 내는 것. 융통성이란 원칙을 깨는 것이 아닌 서로의 원칙을 인정하고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 문을 만드는 것이다. 물이 너무 맑은 곳에서는 고기가 놀지 아니하고, 더러운 땅에 초목이 무성하다고 한다. 곧고 강직함은 때로는 자기 자신을 겨누는 화살과 같다. 더구나 판단력의 부재로 인한 강함은 강함이 아닌 편협함이 될 수도 있다.

삶은 크고 작은 것이 맞물릴 때 완벽할 수 있고, 강하고 부드러운 것이 병행할 때 아름다울 수가 있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다. 특히 가족들의 모든 삶에서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 소양이 바로 사랑을 전제로 한 융통성과 조합이다. 지나친 아집이나 독선으로 외곬수의 판단과 실천을 고집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양보와 화합의 마음으로 시작된 이 관계의 노하우는 이웃과 조직, 나아가서는 세상을 바꾸는 근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마철로 접어들었다. 수시로 비가 내리고 있다. 이른바 폭염과 폭우의 교차가 자주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축축하고 찐득한 느낌에 불쾌지수도 한껏 높아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비단 나만 그런 상태는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분이 저하되거나 짜증을 쉽게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려니 하고 기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정말 미련한 짓이다. 먼저는 자신을 평온하게 정화한 후에, 부부 사이, 가족들과의 사이를 화기애애하게 조성하고 나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신선하고 상큼한 기운을 전파하는 멧신저의 역할을 해보는 건 어떨까? 7월이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 7월의 주인공이 되어보자. 남아있는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보자.





의정

더보기

LIFE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