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삼/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 詩作NOTE -
국어사전에서 ‘당신’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참 다양한 뜻과 해석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뭐니뭐니 해도 ‘부부간의 정감 있는 호칭으로서의 의미’라는 설명이다. 당신은 ‘내 몸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이는 ‘여보’와 함께 부부간의 깊은 신뢰와 존중을 상징한다고 나와 있다. 가만히 입으로 뇌어보면 이 ‘당신’이라는 호칭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보다도 은근하고 정겹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인가? 옛 기억의 창고들을 돌아보니 필자의 시 중에서 이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작품이 엄청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당신’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하는 속내의 표현이 그간 상당했었다는 증표다.
그리고 오늘 고른 이 시는 그 중에서도 구태여 다른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그냥 더도 덜도 말고 온전한 ‘당신’을 떠올리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빚은 시다. 그렇기에 억지로 다른 말을 붙여서 함께 어우러지게 할 이유도 필요도 없음이다. 그냥 ‘당신’이기만 하면 된다.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너를 대하는 나의 호칭, 그건 그냥 그저 ‘당신’이면 되는 거다. 오직 ‘당신’이라고 불러 마땅한 내 곁의, 나만의 ‘당신’이면...
그런데 그 ‘당신’을 애타게 찾는데, 간절하게 부르는데, 도무지 대답이 없나보다. 묵묵부답에 마음은 더욱 애달파지고, 힘 빠진 목소리가 더 잦아드는 모양새는 보기에 참 딱하다. 야속한 ‘당신’이 응답할 차례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예 관심조차 없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토록 소통이 안 된다는 건, 이렇게 일방적이라는 건 결코 권장할 만한 관계가 아니다. 정말 ‘당신’이 나의 ‘당신’이라면 이젠 ‘당신’이 날 불러줄 순서라는 걸 알아야 한다. “여보! 내가 여기 당신의 곁에 있습니다.” 이렇게 선뜻 응해야 하는 거다. 그래야 행복하고 기쁜, 영원한 우리 사이가 이어지는 거다.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는...
1990년에 당시의 유명 가수였던 ‘김정수’가 발표한 ‘당신’이라는 앨범의 타이틀곡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거의 모든 음악 프로그램을 휩쓸면서 마치 남자들의 로망이며 순애보를 대변하는 듯한 가사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울리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불세출의 대중가요다. 가사 중에 보면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 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난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 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라는 후렴구가 반복된다. 이런 고백을 노래로 불러주는데 세상 어떤 여성이 목석인 양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웬만한 잘못 쯤은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그냥 넘어가주는 아량을 베풀어도 전혀 손해볼 것 없다는 기분이 들 법도 하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 남성들이 상투적으로 한동안 써먹은, 입막음 레파토리가 바로 이 ‘당신’이라는 제목의 세레나데(?)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아무튼 필자의 시 ‘당신’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진솔한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다정스럽게 불렀던 건 분명타. 비단 큰 소리를 낼 이유가 없으니 바로 측근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거다. 그럼에도 곧바로 답변이 없음에 화들짝 놀라고 만 충격과 혼돈이 조바심과 함께 오롯이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이건 고백의 언어이며, 고백의 편지인 고백시다. 그래서 몇 편 안 되는 필자의 낭만시편 목록에 기꺼이 수록할 만 한 수작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이제 9월에 접어들었다. 벌써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음이다. 유난스레 길고도 지루했던 지난 여름이 결국 그 기세를 다 했나보다.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던 폭염이나 짓궂은 폭우들도 제 갈 길로 가버리고, 이젠 선선한 바람과 높푸른 하늘로 새 계절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종국에는 이렇게 되고 말 것을 어쩌자고 그리도 포악스럽게 우리를 못살게 굴었었단 말인가? 역사적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 계절의 악명을 격하게 각인시킨 그 여름을 우리는 기억조차 하기 싫다. 그래! 일단은 잊자. 이제 새 계절 가을이 열리는 걸, 새삼스레 불편했던 기억을 자꾸 되새겨서 무얼 할 건가? 지금부터는 우리에게 찾아준 이 가을을 얼마나 멋지고 보람차게 살아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는 거다. 어차피 내년에 다시 올 여름은 그 때 가서 다시 맞이하며 고민하면 되는 거고, 아직은 먼 이야기이니까, 상흔과 시름은 다 접어두는 게 상책이리라.
철학자 ‘칸트’가 말한 행복의 세가지 조건을 보면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면서 감사하기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탐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라거나 기다리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의 결과는 나 자신이 행복함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행복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게 된다. 즉, 행복은 ‘셀프(Self)’인 것이다. 행복의 씨앗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행복은 향수와 같다고도 말한다. 자신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절대 남에게 향기를 줄 수 없다. 자신의 몸이 먼저 행복을 느끼면,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의 몸에 그 행복을 전달하는 것이 순리다. 분명한 사실은 몸은 전셋집이라는 거다. 임대기간이 다 되면 원하지 않더라도 돌려줘야 한다. 그 때 하자보수는 필수다. 과연 몸은 무엇일까? 몸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지식이나 영혼도 건강한 몸 안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몸이 아프거나 무너지면 별 소용이 없다. 집이 망가지면 집은 짐이 되고 만다. 이미 안식처나 피난처로서의 의미나 자격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 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몸만이 현재다. 생각은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몸은 늘 현재에 머문다. 현주소가 몸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몸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늘 모든 것에 우선한다. 몸이 곧 자신이다. 좋은 것만 있을 때는 내게 그것이 어찌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할 땐 사랑의 방법을 모르며, 이별할 때는 이별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때때로 바보처럼 사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지 못하고, 늘 건강할 줄 알았으며, 넉넉할 땐 늘 넉넉할 줄 알았고, 빈곤의 아픔을 몰랐다.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몰랐고, 늘 곁에 있어줄 줄 알았다. 당연히 내 것인 줄 안 걸 차차 잃어갔을 때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다. 좋을 때 그 가치를 모르면 평생 바보처럼 산다는 걸 몰랐다. 오늘 이 시간이 최고 좋은 때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멋진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팁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바로 아주 가까이에 있는, 그래서 소리 죽여 불러도 이내 답할 사람, 바로 ‘당신’의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행복이며 최상의 목표인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 가을에 꼭 붙잡고 살아갈 화두가 바로 ‘당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