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 / 칼럼니스트.작가. 시인
- 詩作NOTE -
참 오래 전에 필자가, 한 때는 그래도 제법 잘 나가던 사업에서 실패하고, 재기를 다지면서 길지 않은 변두리 입시학원 강사로 전전할 때 지은 시다. 그 시절의 고단한 행적을 추억이라고 부르기에도 다소 민망하지만 아무튼 오래 전의 기억이 당시와 지금의 처지를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고, 좋은 시절 다 보내도록 도무지 달라지지 않은 삶의 궤적이 한심스러워 스스로를 한껏 비하하고 조롱하다가 회한 실어 책상머리에 앉는다.
나이가 일흔인데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마라톤 풀코스를 뛰거나 조기축구에 나가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부류가 있다. 도대체 몸 관리를 평소에 어떻게 했기에 지금껏 젊은이들처럼 그토록 뛰어다니면서도 지치지를 않는단 말인가? 사실 필자도 젊어서는 체력이라면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했었는데, 공수부대 출신이라 한체력 한다고 자랑하며 어디서나 누구에게도 뒤처지기 싫어 오기부리곤 했었는데, 이제는 겨우 걷기운동에나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나이를 먹고서도 쉴 생각이 없는지 색소폰동호회의 동료들과 주말이면 거리 버스킹을 나가서 연주를 하거나 기타 강습에 열정을 기울이는 부류가 있다. 대관절 감정지수가 얼마나 높기에 아직도 청춘 운운하며 취미 생활에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실은 필자도 소시적에는 대학가요제 입상 경력과 그룹사운드 일원으로 여러 악기를 다루던 뮤지션이었는데, 노래방에서도 마이크 잡으면 뭇시선을 끌곤 했었는데, 이제는 겨우 콧노래나 흥얼거리는 형편이다.
일반적인 실버 세대의 열악한 주머니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지금도 활발하게 경제 일선에서 누비며 어떤 젊은이들보다도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부류가 있다. 과연 어떤 비상한 재주가 있어서 두뇌가 그토록 잘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실상 필자도 예전에는 제법 큰 사업체를 경영한 적이 있기도 했었는데, 모기업체의 임원으로 근무하며 존경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처량한 영세민 처지로 전락한지 한참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주워섬기며 불공평한 요지경 세상에 신세 한탄을 하다보니 더없이 초라하고, 스스로의 무능력에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타. 아!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다시 한 번 세월을 되돌려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대로 이렇게 대책없이 늙어지지는 않을텐데. 미리미리 준비하고 대처하고, 어떤 난관이나 역경이 와도 결코 흔들림 없을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릴텐데. 노후 준비를 착실하게 해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품격이 뭔지 보여줄 수 있을텐데.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이미 빈손인 것을. 벌써 오래 전에 승리자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세상의 구석에서 겨우 모진 삶을 연명하고 있는 실패자 중 하나인 것을. 자학하고 자성하며 끙끙거리다가 문득 작은 깨달음 하나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정말, 정말로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한가? 남은 것도, 나누어줄 것도, 소중히 간직할 것도, 그 어떤 것도 남겨진 게 없단 말인가? 모든 승리자를 바라보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소외된 채, 그저 막연한 부러움에 잠겨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극히 소수의 성공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서민, 소시민들은 어떤 소망이나 행복도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의무적으로 이어나가야만 하는 피상적인 운명의 버려진 생명체란 말인가? 아닌데, 그게 아닌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귀하고 찬란한 빛을 품고 존재하게 된 건데, 그리고 세파에 휩쓸리면서도 수많은 고난과 도전 속에서 굳건히 살아남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건데, 어찌 그처럼 무가치하고 볼품없다 단정지을 수 있으며, 값어치 없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장점이 있다. 다른 사람과 구별할 엄연한 특징이 있고, 남들은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능력이 있다. 설사 그것의 결론이나 여파가 엄청나고 훌륭하지는 못할지언정, 성실하고 근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세상을 빛낼 의무가 있고,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이웃과 교류하며 현실을 영위하면 되는 것이다.
오래 전 필자가 갖고 있던 꿈과 소망들이 세월 따라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며, 맥없이 나이를 먹어 전부 상실하고 퇴보한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이며 적당한 소질과 적응력으로 집약되어 현실화 되었듯이 말이다. 얼마 전 어느 저명한 인문학 강사의 토크쇼에 참석한 적이 있다. 순서의 말미에 자유 토론 형식으로 강사와의 대화 시간이 주어졌다. 어쩌다보니 말 많은 필자와 강사의 단독 토론처럼 길게 시간이 주어졌고, 서로의 질의와 응답을 통해 우리는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소 지루할 수도 있었는데도 참석했던 청중들은 잘 참고 기다려주었고, 우리의 토론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박수를 보내주었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사람의 가치와 본질적인 존재의 의미’였다. 거창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삶의 고귀한 가치에 대한 예찬론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새삼 느꼈다. 남겨진 삶이 얼마일지 궁금하지만 삶의 양보다는 질적인 면이 그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에 언뜻 소름이 돋았다.
깨닫고보니 필자의 달란트 중에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온 어떤 것이 분명 있었다. 비록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평생을 추구하며 걸어온 시인의 길과, 우리 말 우리 글을 통해서 찾고자 한 진리 발견을 향한 탐구심, 그리고 그걸 강연이나 세미나를 통해 전달하고, 글로 표현하며 세상과의 끈을 잇고자 애를 써왔던 필자의 삶의 여정은 그냥 허접하고 저렴한 개인적 행위에 불과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비록 뛰어난 필력으로 걸작을 양산하거나 높은 수준의 등용문 당선과 수상 등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문객도 못 되고,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여 독자를 동원하는 인기 절정의 시인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나이에도 늘 꾸준히 시를 짓고, 여러 매체에 글을 올리며 비교적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건 나름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도 자부한다. 그러면 그것으로 필자의 삶은 필자만의 제목을 붙일 정도의 삶은 되는 것이리라.
하물며 별로 내세울 것 없는 필자가 이럴진대, 섭리에 의해 선택되어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어찌 하나라도 쓸모 없고 무가치한 삶이라고 폄훼할 수 있을까? 필자는 단연 정의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며 현실의 주인공이라고... 오늘, 또 좋은 아침이다. 아침 공기가 많이 차가운 날, 따뜻한 감사로 시작하는 하루다.
우선 자신에게 감사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스스로에게 먼저 감사를 보낸다. 오늘도 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 그리곤 곁에서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어 감사한다.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주변에 대한 통찰력이 깊어진다. 감사할 일이 생겨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조건들을 찾아 감사하며, 저절로 표현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실족하지 않고 지나온 삶의 발자국들에게, 만날 때마다 소리 내어 인사를 건넨 훈훈한 인정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격려를 아낌 없이 보낸 이들에게, 늘 똑같이 인사를 건네며 서로에게 힘을 주는 동네 이웃들에게, 미래를 향한 꿈을 함께 꾸는 동료들에게, 그리고 길고 긴 삶을 구성하는 사람의 인연과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삶에게 필자는 한없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