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 / 칼럼니스트 詩作note 이번 주의 주제는 ‘시간’이다. 시간을 바라보는 자세와 여건에 따라서 달리 느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시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지는 조건이다. 자산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누구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과 양이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간은 짧건 길건 구애받지 않고, 우리네 삶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자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우리를 품고 있다. 우선 그걸 전제로 여행을 떠나보자. 백과사전에서 ‘시간[time, 時間]’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해설이 붙어있다.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 또는 그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길이, 질량과 같이 다른 물리량을 정하는 기본단위이다. 물리적 시간을 정하기 위해 현재는 원자시계 등을 이용한다. 물리량으로서 객관적으로 정해지고, 길이 및 질량과 함께 다른 물리단위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로 사용된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건 해설이 더 어렵다. 볼수록 헷갈린다. 사실 시간은 학술적으로 연구하거나 세부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은 누구나 다 아는 시
림삼 / 칼럼니스트 .작가 ● 대망의 무술년 새해가 밝았다. 정말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정유년 한 해가 저물고, 대망의 무술년 새 해가 밝았다. 근대사에서 다시없을 다사다난의 사건들을 상처로 간직한 채,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감싸주고 보듬어줄 새 아침의 밝은 햇살이기에, 우리는 다시금 희망과 염원을 소중히 간직한 첫 걸음을 떼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그 해의 총체적인 느낌을 담아 사자성어를 발표하는 ‘교수신문’이 2017년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선정했다. ‘그릇된 것을 깨어 버리고 정도(正道)를 바로 세운다’는 의미다. 이번 사자성어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적폐청산을 통해 정도의 새로운 기틀을 바로 잡아 나가자는 바람이 담겨 있다. 국정농단으로 짓밟혀진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국민적 여망이 내재해 있다고 하겠다. 실상 이 말은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의 불교 용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11년 말에 교수신문이 진행한 ‘2012년 임진년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에도 파사현정이 선정된 바 있다는 것이다. 즉, 5년 만에 올 해
작가 /칼럼니스트 림삼 詩作 note 새 해 첫 시로 선정하기에는 좀 모양 빠지는 걸까? 벽두부터 궁상떤다고, 차마 우중충하다고 손가락질 하려나? 다른 이들처럼 전문가답게 무게 좀 잡고, 거시적인 권두시나 건설적인 제언시 정도를 선정해서, 멋드러진 시작노트로 장식하며 쌈빡하게 시작할 걸 그랬나? 그래도 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아침이거늘... 무술년 새 해가 시작되었다. 다사다난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엄청난 사건 사고들을 품어안고, 꼬리도 자르지 못한 채 정유년 묵은 해가 저물고, 어찌어찌 황금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복잡한 삶의 흔적을 상처처럼 새기고 그 위에 덧칠하는 심정으로 시작하는 개인적으로나, 해결해야 할 과제를 산더미처럼 짊어진 채 무거운 한숨으로 시작하는 국가적으로나, 갈등과 분쟁을 운명인 양 받아들이며 버릇처럼 드러내는 발톱으로 시작하는 국제적으로나, 참 갈 길이 멀고도 지난하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가 어차피 갈 길이고, 꼭 가야만 하는 길인 것을. 내키지 않더라도 먼저 손 내밀어 화해와 협력을 제안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양보와 겸손을 실천하면서, 조심조심 한 발씩 걷다보면 혹여 우리가 염원하는 평화가, 우리가 갈구하는 번영이, 그리고
림삼 칼럼니스트 - 詩作note - 목하 ‘세모(歲暮)’다. 요즘은 ‘세밑’으로 순화해서 사용하기도 하는,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라는 뜻의 단어다. 이제 이번 주만 지나면 새 해다. 대망의 ‘원단(元旦)’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정작 우리의 설날은 음력으로 쇠는 거니까, 원단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달력의 첫 장을 열어 바야흐로 가슴 뛰는 역사가 새로 쓰여지기 시작하는 건 실제로 양력 정월 초하루다. 그러니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며, 예컨대 한 해의 ‘효시(嚆矢)’다. 그 바로 앞에 우리가 섰다. 그러니 어찌 두근대지 않으랴! 생각할 것도, 작심할 것도 많고, 돌이켜 반성하며 의지를 곱씹을 일도 부지기수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절이다. 하지만 정작 이럴 때, 과연 어떻게 처신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갈무리를 해야 옳을지, 다가오는 날들의 계획이나 포부는 어찌 정리를 해서 개시를 해야 할지를 제대로 알아 처신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를 않다. 그냥 앞뒤도 미처 모르고, 시비도 차마 분간키 어려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는 바뀌고, 어느 결에 새로 밝아온 해가 다시금 속절없이, 하릴없이, 맥없이 뜨고는 진다. 막상 후회
시인 /수필가 박 은 영 - 문학메카 낭송포럼 회장 -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부회장 - 광주광역시 시인협회 부회장 - 동행문학지교 대표 - 교육부 기간제 강사 - 미래교육과학부 제2외국어 심의위원 - 투데이전남 편집위원 난희야 너울 속에 파도처럼 나의 노래에 초록물 짙게 드려진 멍을 같은 그리움 너는 아느냐 하이얀 배꽃 물결보다 더 빛나던 보름밤 발목 기브스한 채로 숙이와 셋이서 학교 운동장 콩클의 밤을 누리던 파릇한 설렘 초여름 산들 바람 너에게 간다. 난희야 담장 밖 미루나무 우듬지 까치집마저 몸살나게 하던 너의 생생한 아우성 각색 상단 환희의 흔적까지 욕설 같은 살결에 달무리로 온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림삼 칼럼니스트 - 詩作note - 이즈음이면 특별히 탄생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면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곱씹게 된다. 바로 성탄절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엄숙하고도 빛나는 역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비단 종교적인 관련성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지구촌 모두의 축제이며 경사로 여겨진지 오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금은 들뜨고 한껏 흥분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랑의 나눔이 지금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이 시는 외손자 ‘세영이’가 태어났을 적에 축하의 의미로 지어주었던 시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잘 자라주어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딸아이가 둘째를 가졌다. 그리고 내달 초면 해산을 하게 된다. 듬직한 사위를 들여 일가를 이루더니 알콩달콩 잘들 살아간다. 보기 참 예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잘 안 하고, 아이 낳기 꺼려해서 날이 갈수록 출산율이 저하되며,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노령사회로 접어든다고 걱정들이 여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딸의 가정에서는 계속 어린 생명의 울음소리가 들려난다는 건 필시 하늘의 축복이리라. 유난히도 아이를 좋아하는 사위의 심성도 큰 몫을
림삼 칼럼리스트 - 시작노트 - 어느 가을날에 때맞춰 다루려고 했던 시다. 어쩌다보니 조금 철 지난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억지로라도, 마지막 보내는 가을의 숨결 한 자락 쯤은 남겨진 게 있는가 하여 두리번 거리고 있으니까, 아주 늦어버린 건 아니라 여겨 조급히 서둘러본다. 커피! 커피? 사실 이런 저런 예를 들어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친숙한 우리들의 벗이다. 커피를 주제로 하여 시를 쓰거나 예술적 대화를 이어간다고 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신선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너무 흔하고 지천에 널렸으니 진부하고 식상한, 한 마디로 그저그런 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언제나 커피를 대할 때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다. 감추어졌던 아름다운 글을 토해내고 싶기도 하고, 번지수도 모르는 어떤 음률에 맞추어 흥얼거리게 되기도 하고, 솟아오르는 김이나 거품을 그림으로 그려 완성하고픈 충동에 엉덩이가 들썩인다. 커피를 향한 오래된 로망은 젊었을 때보다도 이즈막에 더 열정적으로 피어오른다. 마치 첫사랑의 고백처럼,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사랑과 향수를 추억하라 꼬드기며 필자를 유혹한다. 그래서 필자는
림삼 칼럼니스트 - 詩作note - 참으로 신세 처량하다. 이 시가 자화상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지칭하여 적은 시인지는, 언뜻 봐서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지켜보는 그 처지가 심히 딱하고 측은하다. 자신을 개흙에 비유하는데, 한 술 더 떠서 냄새까지 진동한다고 하니, 뉘라서 그 입장을 동정하지 않으랴. 어찌됐든 가능하다면 속히 그 버덩에서 얼른 털고 나와, 그 참담한 상황을 경험으로 삼아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주기를 바란다는 덕담이라도 건네고 싶다. 요는 심각하고 처절한 체험을 토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를 바란다는 건데, 만일 그렇지를 못하고 늘상 한결같이 그 타령으로만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건 또 더욱 심각한 문제다.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실수할 수도 있지만, 계속 같은 실수가 이어진다면, 그걸 실수라고 간주하여 동정이나 격려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애초에 구제불능의 심리구조나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제 아무리 좋은 여건이나 조건이 주어져도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판에 박은 타성과 잘못된 습관을 반복하면서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살아간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권면을 하고 지적을 해도 눈도 깜빡하지 않